해가 중천에 뜬 오후 3, 광주버스터미널 뒤쪽 골목에서 서너 명의 공수부대원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곤봉을 휘두르며 한 학생을 쫓고 있다. 막다른 길에 몰린 학생은 뒤를 돌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빈다. 대문에 나와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학생을 몸으로 막아서며 공수부대원에게 봐달라고 사정한다. 공수대원은 ‘비켜, 이 새끼’라는 말과 함께 곤봉으로 할아버지의 머리를 후려친다. 공수대원은 피를 뒤집어쓰고 고꾸라지는 할아버지를 밀치고, 돌을 들고 저항하려는 학생을 역시 곤봉으로 후려친 뒤 날카로운 대검으로 등을 쑤신다. 공수대원은 축 늘어진 학생의 다리를 잡아 고깃덩이를 옮기듯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간다. 1980 5 18,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공표된 다음날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물론 이 장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왔던 끔찍한 장면들도 실제 그 날에 있었던 일에 비하면 새발의 피. 공수대원들은 여학생을 폭행하고 대검으로 상의를 찢고, 희롱하고, 유방을 칼로 그었다. 말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예외 없이 폭행을 당했다. 부상자를 싣고 가던 택시를 멈추고 기사에게 부상자를 내리라 명령하고, 그에 불응하는 기사를 대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붙잡혀온 시민들이 눈동자를 움직이면 얼굴이나 눈알을 담뱃불로 지지고, 발가락을 대검으로 찍고,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을 먹이고, 대검으로 맨살을 긋고, 송곳으로 살을 후벼 팠다.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 경찰이 시민에게 눈물로 애원할 정도였다.

왜 공수부대원은 광주시민들을 때리고 죽여야만 했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민주화 세력 제거를 위한 음모

 

1979 10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되고 꾸려진 계엄사령부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과 측근들을 지방으로 전보 조치하려고 했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데다 권력욕이 강해 정권안정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그 해 12 12일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정승화 총장 등 자신에 적대적인 군부 인사들을 박 전 대통령 살해공모죄로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한다. 이른바 ‘12·12사태로 군부 실권자가 된 전두환은 보도검열, 언론사주 회유 등을 뼈대로 하는 'K(King)-공작계획'을 실행, 언론을 통제했고 1980 4월에는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해 국가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군부와 언론, 정보기관을 장악해가며 대통령, 국회 등 정치권을 무력화했음은 물론이다.

제도권 권력을 모두 장악한 전두환이었지만, 안정적 집권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두 가지 있었으니,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과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이 그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전두환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진 않았지만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남한정국의 안정을 더 중요시했다. 미국의 의중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남한의 국민이 지지하면 전두환의 집권을 반대하진 않는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제 전두환은 국민의 지지를 얻으면서 민주화 세력을 와해시키기는 방법만 고안하면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이 고안해낸 방법은 ‘북한 남침설 유포’였다. 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계엄군의 정당성을 높이는 한편, 민주화 세력을 간첩으로 몰아 소탕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계획이었다. 언론을 통제한 신군부는 북한 남침 가능성을 부정하는 외신의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하고, 남침을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만을 쏟아냈다. 북한을 이용한 공작은 민주화 세력을 와해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5 15일 전국적으로 벌어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북한의 공작으로 치부해 와해시킨 것이 그 예다. 언론의 왜곡된 정보만 접한 시민들은 대학생들의 시위에 무관심했고, 시민의 눈이 없는 상황에서 무장군인과 대치할 수 없었던 학생들은 시위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세력을 성공적으로 무력화한 신군부는 이제 계엄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등 시나리오를 진행할 일만 남았다. 사실상 계엄전국확대과정에서 민주화 세력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5·18은 계엄전국확대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으니, 전두환에게 그것은 쿠데타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걸림돌 제거작업이나 다름 없었다.

 

화려한 휴가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들의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어 우리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에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라는 허수아비 대통령최규하의 성명과 함께 5 17 24(5 18 0)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 성명 이전에도 계엄령은 제주도를 뺀 전 지역에서 시행 중이었으니 표면적으로 전국확대는 제주도를 비상계엄에 포함시킨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전두환의 정권장악이었다. 5 18일 이전까지는 ‘대통령-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이었던 지휘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은 허수아비였고, 계엄사령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도 전두환이 지명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제 전두환은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포스터

 

전두환 독재체제로 전환되는 신호탄이나 다름없던 계엄령 전국확대에 민주화 세력이 반발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신군부세력은 그들의 반발을 무력화할 방책을 세운 상태였다. 각 지역의 주요거점에 군이 배치돼있었고, 체포할 정치인 및 재야인사 800여명의 명단도 작성돼있었다. 전두환은 계엄확대와 동시에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대학교에는 휴교를 명했다. 이와 동시에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포함한 정치인, 재야인사 수 천명을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신군부의 민주화 세력 와해전략은 ‘김영삼VS김대중’구도였다. 신군부는 이미 김대중을 내란책동의 수괴로 만들고 호남지역을 간첩의 근거지로 몰아갈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정치인 및 재야인사를 체포할 때 김대중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대거 포함됐고, 체포된 인사들은 고문에 의해 신군부가 읊어주는 시나리오대로 진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김영삼은 체포하지 않고 자택에 감금해 외부와 격리하기만 했다. 한편, 민주인사 검거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김종필 등은 권력형 부정축재로 잡아들여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김영삼이 아니라 김대중을 내란죄로 몰고 간 이유는 왜곡하기 쉬운 호남의 이미지에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오랜 정치공작에 따라 호남의 급진적 이미지가 국민들 사이에 유포돼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역기반이 미약했던 호남이었기에 억압하는 데 큰 무리도 없었다. 신군부는 이런 전략적 선택으로 지역분열을 일으켜 민주화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고, 정국을 혼란스럽게 해 계엄확대의 명분 또한 얻을 수 있었다. 혼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신군부에 도움이 되는 상황에서 1980 5 18일의 무장진압, 작전명 ‘화려한 휴가’는 시작됐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진압

 

518일 새벽 2시 제7공수여단이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이 날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교문 출입을 저지하던 공수부대원과 충돌했다. 공수부대는 학생을 구타하고, 학생들은 이에 맞서 돌을 던졌다. 오후에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당시 각종 민주단체들이 자리한 가톨릭 회관에 집결했다.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이 투입돼 일반 행인들까지 검문검색하고 무차별 폭력을 자행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고, 쫓아온 계엄군은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으로 보이는 일반시민까지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19일부터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가세했다. 그렇게 시위대는 3,000명으로 늘었다. 시위가 거세지자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날 시민들은 계엄군의 학살에 침묵하는 언론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광주 MBC 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계엄군은 탱크를 동원해 시위대를 깔아뭉갰다.

21일은 시위가 전쟁양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날이다. 이날 0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이날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한 상태에서 협상이 진행됐고, 전남도지사는 헬기에 탄 채 확성기로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가 격하게 반발하자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마구 총을 쏴댔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 병원과 보건소, 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총과 실탄, 폭약 등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에서 탈취해 분배됐다. 이에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위권을 발동했다. 계엄사령부는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계엄군은 광주를 완전 봉쇄했다. 자위권이 발동된 이상, 계엄군은 ‘방어적’ 발포가 가능해졌고 그 결과 광주로 들어오는 버스에 총격을 가해 전복시키는 사건 등 수많은 학살이 자행됐다. 심지어는 죄 없는 아이를 총으로 쏴 죽이고, 농가의 가축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22일 이후 고립된 광주에서는 시민자치가 실시됐다.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질서가 잡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졌고, 행정과 치안의 공백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을 정도였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해제, 민주화 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계엄사에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협상을 주장했으나, 오랜 토론 끝에 무장항쟁으로 가닥이 잡혔다.

5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이날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의 총격을 가해 끝까지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시민군은 자진투항과 결사항쟁으로 의견이 갈려 논의를 계속했다.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고, 계엄군은 도청을 점령했다. 시민군 생존자는 체포·연행됐고 10일간의 학살은 마무리됐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5·18 왜곡작업

 

전두환은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가 마를 새도 없이 광주학살의 실체를 왜곡하고 은폐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언론은 광주학살에 관한 진술을 ‘유언비어’로 만들기 시작했다. 정부조사관은 여론조작을 위해 학생이나 민간인이 군인을 구타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찾는데 혈안이 됐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다 ‘유언비어 유포’로 연행됐다.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가장 앞장섰던 조선일보는 5 25일자 사설에서 광주시민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으로 몰아붙이고, 57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들먹이며 광주시민을 일본인 폭도에 비유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28일에는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군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는 사설을 내보내기도 했다.

교과서를 통한 왜곡도 만만치 않았다. 1982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아예 5·18을 다루지 않은 채 발간됐고,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현대사>와 ‘고시용 국사교과서’로 통용되던 변태섭의 <한국사통론>에는 광주사태가 발생했으며 정부는 비상계엄을 통해 이를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했다고 서술, 5·18을 ‘수습’해야 할 ‘사태’로 규정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수습에 성공한 ‘새 지도층’으로 묘사됐음은 물론이다.

왜곡의 절정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었다. 1980 9 17 1심 군사재판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판결문의 요지는 “대학의 복학생들을 행동개원으로 포섭, 학원소요사태를 폭력화하고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 사태를 유발, 현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 했음이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광주항쟁 이전 이미 검거된 상태에서 광주항쟁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숱한 고문으로 만들어진 억지 시나리오였다.

 

피해와 판결내용

 

광주광역시 2009년 집계 결과에 따르면, 5·18 당시 사망자 264(보상금 수령자 기준, 부상 후 사망 포함), 행방불명자 166, 부상자 3,139명 등 총 5,189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 6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시절, 5·18관련 고소·고발이 줄을 이었다. 1995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인용결정을 내렸다. 국회는 5·18 특별법을 제정, 공소시효 정지규정을 두었다. 결국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 1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및 관련자들에게 쿠데타와 5·18 사건에 대한 유죄를 확정했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 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고 있다.

 

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가르쳐준 5·18

 

“5·18을 기억하자.” 매년 5 18일이 되면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물론 군사독재정부의 학살은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광주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그것을 압살한 정부의 행태를 모두 기억해야 한다. 군사독재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다. 국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기득권에 저항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되찾자는 반독재시민운동은 그 날 광주의 비명이 찾고자 한 하나의 기치였다.

광주시민들의 열망을 기억하는 것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독재정부가 어디까지 시민을 능멸할 수 있는지. 전두환은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았다. 뿐만 아니라 좌우를 갈라놓고 비난의 화살을 서로에게 돌리게 하는 철저한 분리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시민을 간첩으로 몰고 비난을 퍼부었다. 광주의 학살을 재현하지 않으려면 결국은 비판의 눈을 길러야 한다. 언론은 언제든지 통제될 수 있다는 것, 정부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군사독재를 향해 끝까지 저항했던 그 날의 광주를 기린다면, 다시는 이 땅에 군사독재가 실현되지 않도록 시민이 깨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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