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선거를 앞두고 이해찬 전 총리의 이름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민주통합당의 막후실세’ ‘책사’ 등의 이름으로 선거판을 직접 짜고 있다는 추측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 전 총리의 경력을 감안하면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다. 1992년 대통령선거 기획단장, 1995년 서울시 정무부시장, 1996년 총선 기획단장, 1997년 당 정책위의장 등 전략·기획과 관련한 직책만 두루 맡아온 그다. 재야에 있을 때도 상황실 등 기획과 관련된 일에 힘썼고, 운동노선결정 등 재야운동의 전체 판을 짜는 일에도 관여했다. 지금까지도 기획통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해찬. 그의 경력에는 배워야만 할 전략기획기술이 수없이 담겨있다.

 

능력에 맞는 전략을 짜라

 

이해찬의 전략 중 가장 빛나는 사례는 그를 국회의원으로 만든 13대 국회의원 총선거 전략이다. 그는 정치권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출마한 탓에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대학 시절 이후 줄곧 재야에서 활동하던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활동가 경력을 마지막으로 재야를 떠나 평화민주당(평민당)에 입당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입당할 때 그의 나이는 36세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출마하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했다. 당에서도 그를 공천할 생각은 없었으나 선거제도가 바뀌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씩 뽑는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공천할 후보자리가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인물난에 부딪힌 평민당은 관악을 선거구에 이해찬을 공천했다. 당시 관악을구에는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종인, 통일민주당 김수한 등 두 현역의원이 있었기 때문에 당에서도 이해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찬은 출마한 이상 승리를 꿈꿨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해찬은 자신에게 맞는 선거운동을 찾았다. 우선 지역구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당시는 판이 큰 대통령 선거에만 여론조사기법을 도입했고, 국회의원선거에는 여론조사를 동원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에 여론조사를 도입한 셈이었다. 여론조사 결과, 관악을구는 의외로 야당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제는 자신에게 맞는 선거운동전략을 짜는 일만 남았다.


사실 그는 대중연설에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조곤조곤 조리 있게 말하는 데 더 강한 면모를 보였다. 유권자들의 야당성향이 강하니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통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대중연설을 포기하고 ‘좌담회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20~30명 가량이 모인 자리를 찾아가 ‘사랑방 좌담회’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정책을 알리고, 입소문으로 표밭을 일구겠다는 전략이었다. 얼마 안 가 ‘젊은 사람이 말을 잘 하더라’ ‘서울대를 16년간 다녔다(실제로는 13)’는 등 소문이 퍼지면서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전략이 상승세를 불러오자 당은 관악을구를 전략지역으로 선정하고 3,000만원을 추가 지원했다. 그의 기획력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가 전격적으로 도입한 여론조사는 판세를 좌우하는 열쇠가 됐다. 이해찬 측은 여론조사를 통해 자신의 상승세를 알고 있었던 반면, 이를 몰랐던 다른 두 후보는 그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공방전을 벌였다. 두 현직의원이 서로를 깎아 내리며 표를 잃는 동안 꾸준히 표를 모은 이해찬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국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의 승리에는 대선패배 후 호남표가 몰린 지역감정의 영향도 있었지만, 여론조사를 통해 유권자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강점을 살린 선거운동을 전개한 전략이 큰 효과를 봤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시류를 읽어라

 

이해찬은 13, 14대 국회의원 의정활동 평가에서 두 번 다 1위를 기록했다. 국회의장도 원내총무도 될 수 없었지만, 언론이나 시민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국회의원이었던 셈이다. 그가 이런 성공을 거둔 데는 무엇보다 이슈가 될 만한 상임위를 예견하는 그의 능력이 큰 몫을 했다.


13대 국회에 등원한 그는 첫 상임위로 노동위원회를 선택했다. 그전까지 노동위는 인기 있는 상임위가 아니었다. 이권이나 권력, 명예 등에서 ‘따먹을 게 없는’ 상임위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는 노동 분야가 뜨거운 감자가 된다는 점을 예견했다. 5공화국이 끝나고 1988~89년까지 매년 3,000건 정도의 노동쟁의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당의 이상수 의원,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14대 국회에서는 환경문제를 다루겠다며 보건복지위원회 쪽으로 상임위를 바꿨다. 당시는 아무도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정치 이데올로기가 퇴조하면서 환경문제가 새로운 인기정치상품으로 떠오를 것으로 봤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환경문제가 중요한 이슈라는 점, 환경정치를 브랜드로 하는 앨 고어 같은 정치인이 있다는 점이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때 한 재미학자가 미국은 환경산업을 정비해서 제품경쟁력을 높이고, 타국에도 자국의 환경기준을 적용하려 할 것이라는 견해를 개인적으로 전달해왔다. 이를 타당하게 여긴 그는 동료들과 환경사회정책연구소를 만들고 <환경과 사회>라는 책자를 발간하는 등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결국 그는 1993년 한국환경기자클럽에서 주는 올해의 환경인상, 1994년 환경운동연합이 주는 녹색정치인상을 받았다.

 

계획하고 준비하라

 

시류를 읽고 전략을 잘 짠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본기다. 전략기획에 있어 기본기는 역시 끊임없는 계획과 준비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의 비결 또한 철저한 준비였다. 당시 평민당은 청문회에서 활약하기 위해 여의도 맨하탄 호텔에 공동조사단을 꾸렸다. 이때 이해찬은 다른 의원과 달리 맨하탄 호텔에서 살다시피 했다. 스스로 밤샘조사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청문회 내용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그는 실무팀이 준 자료를 읽는 의원과 달리 내실 있는 청문회를 끌고 갈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상대를 요리하는 능력도 결국은 치밀한 준비에서 나온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의 준비성은 국회 최초의 정책보좌진 시스템에서도 잘 드러난다. 13대 국회 전까지 비서관들은 ‘가방모찌’에 불과했다. 가방만 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비서관이 하는 역할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해찬은 비서관을 전격적으로 정책에 활용했다. 나라에서는 4명의 보좌진만 지원했지만, 이들의 임금을 쪼개고 자신의 의정활동비를 보태 20여명의 정책보좌진을 구성한 것이다. 노동위에서 활약할 때도 각 비서관이 노동쟁의, 산업재해 등 한 파트씩 맡아 1년 내내 국정감사를 준비했다. 이슈가 있을 때만 반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계획하고 준비한 결과 시류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책의 방향을 정하는 법도 독특했다. 조순 서울시장 아래 정무부시장을 할 때 그는 민관합동기구방식을 도입했다. 시정에 대해서 잘 모를 때라 관련자들을 전부 모아 회의를 했던 것이다. 시의 관련 간부가 진행 중인 시정상황과 향후 계획을 보고하면, 민간 전문가들이 비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회의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공무원들끼리 토론을 하면서 부서간 폐쇄성도 줄어들고, 민간인들의 비평이 곁들여지면서 여론이 원하는 바도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었다. 시청 신청사 건립계획 백지화 등 난개발계획들이 폐지되는 등 호평을 받은 개혁적 시정은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DJ시절 교육부장관을 할 때도 그는 정책토론을 꾸준히 했다. 토론회의 포맷은 정무부시장 때와 비슷했다. 장관과 차관, 기획관리실장, 교육정책기획관, 교육정책담당관, 장관비서관을 고정 멤버로 하고 토론 주제와 관련되는 부서의 실장, 국장, 고장 등이 참석하는 방식이었다. 그밖에 업무 관련 실무자와 외부 전문가가 참석할 때는 40명 가까이가 되기도 했다. 그 스스로 교육분야에 생소했기 때문에 회의는 취임 후 1년간 총 58회가 열렸다. 한 주에 1.12회 꼴로 정말 끊임없는 준비를 한 셈이다. 이처럼 그는 전략기획을 세우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는 기본을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라

 

기획의 성공은 아이디어에 있다. 이해찬은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선거 최초로 여론조사를 도입해 승리한 것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이디어는 늘 전략적으로 빼어난 면모를 보였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후원회 제도를 도입했을 때도 그의 아이디어는 빛났다. 도덕성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뒷돈을 받을 수 없었던 이해찬에게 소액 다수 투자개념의 후원회야말로 자금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제일 먼저 후원회를 만들고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 제일 처음에는 음악회를 열어 미국식 후원회를 흉내 내기도 하고, 대학원생들을 초빙해 도예전을 열어 판매금액의 절반은 작가들이 갖고 절반은 후원금으로 하는 등 각양각색의 후원회를 개최했다. 또한 미국처럼 소식지에 꼼꼼하게 의원활동내역을 적어 정기후원자가 돈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참신한 방식으로 이해찬은 1996년 후원회 모금 실적 조사결과 야당의원 중 1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그의 방식을 베껴 쓰기 바빴다.


그는 1992년 대선에서 당무기획실장을 맡으면서 역사상 최초로 청년캠프를 도입하기도 했다. 당무기획실장은 서열은 높지 않았지만 대선 전략을 기획하는 핵심 요직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뉴디제이 플랜으로 DJ의 급진적 이미지를 제거하는 데 골몰했지만 이해찬은 뉴디제이 플랜에 비판적이었다. DJ든 아니든 호남 출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DJ개인이 아니라 당 이미지를 더 강조하는 게 옳다고 봤다.


청년캠프는 그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청년캠프는 젊은이들이 간이무대에서 기타를 치거나 춤을 추면서 청중을 모은 뒤 노무현 등 젊은 의원들을 연사로 내세워 즉석 거리유세를 하는 방식이었다. 민주당에는 DJ만 있는 게 아니라 젊고 개혁적인 세력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을 홍보하려 한 것이다. 이런 거리유세는 전철역 등을 중심으로 기동전 형태로 이뤄졌다. 수십에서 수 백 명의 청중을 모아 연설을 하고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해 청중을 모으는 일을 반복하는 기동전 형태는 지금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는 수십만 명씩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대규모 유세전에 비해 돈도 덜 들고 참신해 당시로선 굉장히 유용한 방식이었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해찬은 조순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조순 후보는 인지도에서도 떨어졌고 자금도 부족했다. 이해찬 본부장은 조 후보의 승리를 위해 사상 최초로 미디어 정치를 도입했다. 여기에는 시류를 읽는 그의 능력도 한 몫을 했다. 미국의 선례를 바탕으로 이번 선거가 TV로 좌우될 것임을 예견한 것이다. 그는 대규모 유세를 버리고 소규모 캠프를 구성했다. 어차피 조직적 유세는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선거와 함께 진행될 것으로 보고 TV에 집중한 것이다. 텔레비전 토론 준비팀, 홍보팀, 기획팀 등이 주축을 이룬 그의 미디어정치는 토론회에서 빛을 발했다. 당선이 유력했던 박찬종 후보가 큰 실수를 범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당시 박찬종 후보가 유신체제 지지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화두가 됐는데, 박 후보는 끝까지 발뺌을 했다. 이에 이해찬은 각고의 노력 끝에 증거를 찾아냈고, 이를 다음 번 토론회를 위해 아껴두었다. 토론회의 드라마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조 후보는 해당 증거를 들고 토론회에서 박 후보를 거세게 공격했고, 당황한 박 후보는 녹화를 중단하라며 큰소리 쳤다. 당초 규칙대로 이 장면이 모두 방송돼 박 후보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다. 반면, 이해찬은 조순 후보의 어눌한 말투까지도 ‘진실하다’는 이미지로 포장하는 데 성공해 시장선거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미디어 정치라는 아이디어가 낳은 통쾌한 한판승이었다.

 

명분보다는 실리다

 

정치인들은 일의 마무리보다 과정의 명분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찬은 그 반대다. 그는 명분보다는 실무를 중시하고, 일을 실행하는 데 더욱 골몰한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그의 전략은 결과물을 내는 데 더욱 효과적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연합을 조율할 때였다. 이해찬은 새정치국민회의의 정책위의장을 맡아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의 정책공조를 이뤄내는 책임을 맡았다. 당시 여러 이슈 중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합법화 문제가 있었다. 전교조는 국민회의를 지지하는 대신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자민련에서는 이 의제를 협상테이블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진보정치라는 명분을 위해서라면 전교조 합법화를 밀어붙여야 했지만 이해찬은 전교조 합법화 의제를 과감히 협상테이블에서 내려놨다. 섣불리 의제를 올려놓았다가는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 것이고, 한번 반대한 사안은 다시 논의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DJP연합은 성사됐고 이해찬이 교육부장관이 됐을 때 전교조는 합법화됐다. 괜히 문제를 키우기보다는 조용히 처리하는 데 중점을 둔 전략이었다.


이처럼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은 피하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이해찬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쓰는 전략이었다. 13대 국회의원 때 광주청문회 과정에서 과욕으로 실수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도 그는 이 전략을 구사했다. 당시 그는 다른 간첩사건의 사진을 광주학살 때 사진이라고 청문회에서 제시했고, 이 사실이 드러나 역풍에 휘말렸다. 퇴역공수부대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연좌농성을 벌이자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사건 발발 10일째 되던 날 퇴역공수부대원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과격하게 시위를 벌이자, 여론은 시위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를 틈타 다음날 청문회에서 공개 사과하고, 사과를 했는데도 침소봉대하고 있는 상황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치적 이용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서자 이 사안은 마무리 됐다.


그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이던 시절,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해고자복직을 요구했다. 이해찬은 ‘복직 문제는 3년간 나눠서 단계적으로 해결해주겠다. 임금도 합리적인 선에서 올릴 수 있다. 그러니 파업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기서 보수언론 및 경영자들이 집단으로 반발했다. 해고자 복직은 테이블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한 이해찬은 그때부터 해고자 복직을 얘기하지 않았다. 결국 임금인상과 가압류한 조합비 일부 반환을 조건으로 파업사태는 해결됐다. 두 달 뒤 여론이 잠잠해졌을 때, 서울시는 해고자 일부를 조용히 복직시켰다. 명분을 앞세우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정계에서는 이해찬을 안 좋게 보는 시각이 있다. 재야에서 운동하던 시절에도, 사회운동을 할 때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전략을 짜는 성향이 강했던 그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남들은 구속수감까지 마다 않고 운동을 할 때도 그는 수감되지 않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길을 택했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는 이런 성향은 그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다. 운동을 오래하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된다고 봤고,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냉정함은 그를 전략기획의 달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계획하고 준비했으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해찬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선거 때면 승리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교육부장관으로 있을 때는 정권이 바뀌어도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전략기획의 기술은 시류를 읽고,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어떠한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목적성,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해찬은 기획통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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